여수순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이라고도 부르는 여순사건은 제주4·3사건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이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반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여수, 순천 등 전라남도 동부지역을 점령한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였다. 사건 발생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여순반란사건 또는 전남반란사건이라고 불렀으나 1995년부터 국사 교과서에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일반적으로는 여순사건이라 부른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시작된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 반대 무장봉기가 진정되지 않자, 국군과 경찰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 일부 병력을 제주도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에 1948년 10월 19일, 지창수(池昌洙)를 비롯한 제14연대 병사들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항쟁을 진압하러 갈 수 없다며, 파병 명령을 거부하고 주둔지인 여수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14연대 봉기는 남로당 중앙은 물론이고 전라남도 도당이나 여수·순천의 지역당도 사전에 알지 못했다. 봉기를 처음 계획한 하사관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14연대 봉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제주도 파병 반대였지만, 이전부터 쌓여왔던 군과 경찰 간의 갈등도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장비가 우세했던 경찰은 경찰 보조병력으로 창설된 국방경비대를 깔보았고, 국방경비대는 경찰을 민족과 국가를 팔아먹은 매국노 친일 집단으로 간주했다.
10월 19일 늦은 밤에 시작된 봉기는 다음 날 오전 여수와 순천으로 확대되었다. 순천에서는 경찰관들이 봉기군을 막으려 했지만,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파견대(홍순석 지휘)가 봉기에 합류하여 저지에 실패하였다. 며칠만에 여순사건은 광양, 구례, 보성(벌교) 등 전라남도 동부지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14연대는 여수에 들어온 후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란 이름으로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4연대는 성명서를 통해 “모든 애국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고 밝히고, ‘동족상잔 결사반대’와 ‘미군 즉시 철퇴’ 등을 요구하였다.
10월 20일 오후, 여수에서는 수천 명이 참가한 인민대회가 열려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 기구 접수’, ‘대한민국 분쇄 맹세’,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실시’ 등을 결의하였다. 여수, 순천에서는 지방 좌익세력과 청년·학생들이 봉기에 참여하면서 대중봉기로 전환하였다.
인민위원회가 재건된 여수에서는 경찰을 체포하고 친일파의 은행예금을 동결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한편, 식량영단 창고를 개방하여 쌀과 물자를 시민들에게 배급하였다. 여수 외 다른 지역에서는 경찰이나 우익인사에 대한 인민재판을 실시하기도 했다. 순천까지 장악한 14연대는 10월 20일 밤 세 그룹으로 군대를 재편했다. 3개 편대 중 첫 번째 부대는 벌교 방면[서쪽], 두 번째 부대는 학구 방면[북쪽 방향], 세 번째 부대는 광양 방면[동쪽]으로 진출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처음에는 이 사건이 극우세력과 극좌세력이 합심해서 일으킨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이범석 국무총리는 10월 21일, 여순사건은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한 ‘반국가적 반란’이라는 이른바 ‘혁명의용군사건’을 발표했다. 그러나 혁명의용군은 조직적 실체도 없는 허상의 군대였고, 이후 재판에서 무력공산혁명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혁명의용군사건에서 가리키는 ‘극우 정객’이란 김구 등의 한독당 세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구는 극우세력이 관련되었다는 정부 발표에 대해서 곧바로 부정하였다. 김구가 여순사건 관련 주장을 부정하고 일반 여론도 이에 동조하지 않자, 김형원 공보처차장은 말을 바꾸어 “여순사건은 전라남도 현지 좌익분자들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일부 군대를 선동하여 일으킨 것”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국방부는 여순사건을 “소련제국주의의 태평양 진출 정책을 대행하려는 공산당 괴뢰정권의 음모”라고 규정하였다. 여순사건을 반도 남쪽의 한 지방에서 이승만 정부에 반항한 사건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소련 지배권을 확대하려는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철저한 진압 방침을 세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라는 강경한 담화를 발표하였다.
반란 소식을 들은 서울의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는 10월 20일 오전에 관계자 회의를 열고, 진압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의를 주도한 것은 미국 임시군사고문단이었다. 미군은 진압작전을 펼칠 때 미국인 군사고문단 장교를 대동하도록 했다.
10월 20일 오후, 서울에서 군 지휘부가 광주에 도착하자 구체적인 진압작전이 수립되었다. 육군총사령부는 10월 21일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 제5여단 사령부에 설치하고 총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는 한편, 진압작전에는 작전 가능한 병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대전(제2연대), 전주(제3연대), 광주(제4연대), 부산(제5연대), 대구(제6연대), 군산(제12연대), 마산(제15연대)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 가운데 총 11개 대대가 진압에 투입되었다. 이들 병력 중 제2연대·제6연대·제12연대·제15연대는 원용덕이 지휘하는 제2여단으로 소속되었고, 제3연대와 제4연대는 김백일이 지휘하는 제5여단에 소속되었다. 부산의 제5연대는 해안경비대와 함께 여수 앞바다에서 해상작전을 전개했다.
진압군은 순천 북방에서 벌어진 학구전투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진압군은 순천을 공격했으나 봉기군의 저항에 직면하여 쉽게 순천을 공략하지는 못했다. 봉기군은 진압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닫고 밤을 이용해 순천에서 퇴각하였다. 이후 진압군은 비교적 손쉽게 순천을 점령할 수 있었다.
10월 24일부터 시작된 진압군의 여수 공격은 치밀한 작전 계획을 갖고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봉기군과 지방 좌익세력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여수에 대한 초기 진압작전에 실패하자 진압군은 기계화 부대와 해안경비대, 그리고 연락용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초토화 진압작전에 나섰다. 여순 진압에서는 군 역사상 최초로 육군과 해군, 공군의 합동작전이 실시되었다. 결국 여수를 방어하던 봉기군과 지방 좌익세력도 더 이상 여수를 지킬 수 없어 인근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진압군이 여수 공격을 감행 중이던 10월 25일, 국무회의는 여순지역계엄령(대통령령 제13호)를 통과시켰다. 계엄법은 일 년이 지난 1949년에야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시는 계엄법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을 때였다. 국무회의에서 계엄령이 통과된 다음 날, 호남방면사령관은 여수·순천 지구에 임시계엄을 선포했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과 경찰은 우익 청년단원들과 지방 우익세력의 도움을 받아 협력자 색출에 나섰다. 혐의자들에게는 아무런 법적인 변호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우익세력의 ‘손가락 총’에 지목되어 즉석에서 참수, 사형되거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국군의 여수·순천에 대한 진압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반란을 일으켰던 14연대 정규 병력은 이미 산악지대로 탈출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진압군 작전은 정규 반란군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적으로 삼는 무차별적인 공격이 되었다.
진압군은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전 시민을 학교운동장에 모이게 하여 협력자를 색출했다. 당시 심사의 기준이 된 것은 교전 중인 자, 총을 가지고 있는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흰색 지까다비(일할 때 신는 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미군용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였다.
주민들 가운데 흰 고무신을 신고 있는 사람도 봉기군으로 간주되었다. 흰 고무신은 지방 좌익세력에게 처형당한 우익인사 김영준이 운영하는 천일고무공장에서 제조한 것이었는데, 봉기 기간에 인민위원회가 이를 배급했기 때문이었다. 또 국방경비대가 입고 있던 군용 표시가 있는 속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혐의 대상이었다. 진압된 뒤 겉옷은 버릴 수 있지만 속옷은 갈아입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다. 이 기준들은 원래 제14연대 반란군을 색출하기 위한 기준이었지만, 진압군은 이런 외모를 봉기군 협력자로 간주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사용했다.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이 지역의 존경받는 우익인사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인민재판 배석판사로 참가했다는 누명을 쓴 황두연[순천 갑구 국회의원]은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박찬길[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차석 검사]은 진압군에게 총살당했고, ‘민중을 총연합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이라고 잘못 알려진 여수여자중학교 교장 송욱은 행방불명되었다.
진압군의 부역자 색출 과정은 12월 중순까지 약 한 달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또한 계엄령하에서 군법재판이 열려 많은 수의 민간인이 회부되었다. 군법회의는 계엄사령부가 있었던 광주와 중앙고등군법회의가 설치된 대전 등지에서 열려, 수천 명의 혐의자들을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빠른 속도로 처리해 갔다.
여순사건이 끝난 뒤 정부는 조사관을 파견하여 여수, 순천, 구례, 곡성, 광양, 고흥, 보성, 화순 등지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이에 따르면 1949년 1월 10일까지 인명 피해는 총 5,530명(사망 3,392명, 중상 2,056명, 행방불명 82명)이고, 가옥 피해는 8,554호(전소 5,242호, 반소 1,118호, 소개 2,184호)였다.
가옥을 비롯한 총 재산 피해 추정액은 99억 1,763만 395원에 달했고, 가장 긴급한 구호가 필요한 대상 주택은 1만 3,819호로서 그 인원은 6만 7,332명이었다. 단 일 주일간의 피해가 이처럼 막대했는데, 이러한 피해의 대부분은 진압군의 강경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여순사건이 진압된 후 이승만 정부는 내부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물리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군대와 경찰을 정비했다. 경찰관을 증원하는 한편 우익 청년단체들은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하고, 학교에는 군사훈련을 위해 학교별, 지역별로 학도호국단을 창설했다. 군대에서는 좌익세력 색출을 위한 숙군(肅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49년 7월까지 국군 병력의 약 5%에 이르는 총 4,749명이 숙청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또 좌익세력 색출을 위한 강력한 법제를 마련했다. 급속하게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1949년 한 해 동안 전국 교도소 수용자의 70%에 달하는 11만 8천 명에 적용될 만큼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여순사건은 공산주의자를 민족과 국민의 범주로부터 추방함으로써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여순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한 언론은 반란군의 잔혹한 학살을 부각시켰고, 진압 후에 현지에 파견된 문인조사반은 ‘잔인무도한 귀축(鬼畜)들’, ‘악의 승리’ ‘인간성 상실’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봉기군의 만행을 표현했다. 이에 따라 봉기군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잔인한 짐승으로 여겨졌고, ‘절대 악’이었기 때문에 같은 민족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표현처럼 반란자들은 “한 하늘 아래 두고는 같이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진압군에 의해 전라남도 동부지역은 10월 말에 완전히 장악되었지만, 14연대 반란군은 지리산 등 산악지대로 입산하여 유격투쟁을 계속 전개하였다. 여순사건은 지역적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전국적인 정치적·사회적 관심을 집중시켰고, 이 사건을 계기로 형성된 반공체제는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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